서기 800년대 중세 시대에는 아시아 지역으로부터 건너온 쟁기로 인해 유럽의 농업이 발달했고, 수학 분야에서는 방정식이 개발되었으며 대수학으로 발전했습니다. 중국 당나라에서는 화약이 발명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사건들과 더불어 농업 혁명에 대한 이야기도 적어보려고 합니다.
유럽으로 건너온 쟁기 - 서기 800년
고대 로마 시대부터 유럽의 농민들은 땅을 일굴 때 수소의 뿔을 사용했습니다. 이 도구는 햇빛이 많은 지중해 기후에서는 농작물의 파종이 가능했으나 서유럽 북부의 단단한 땅에서는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서기 800년경 무거운 바퀴가 달린 쟁기가 아시아 지역에서 전해졌습니다. 아시아에서는 이미 수 백 년 전부터 쟁기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힘이 좋은 쟁기는 유럽의 벌판들을 바꿔놓으며 농업혁명을 선도했고, 처음으로 수확한 식량이 남아돌아 다른 지역에 팔 수 있는 정도였습니다. 이에 따라 유럽의 귀족들이 부를 축적할 수 있었고, 토지에 기반한 봉건제도가 등장해 유럽 사회의 기본구조를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방정식과 대수학 - 서기 825년
숫자 놀이는 만물의 핵심에 놓여 있는 신비를 풀어 가는 힘을 지니고 있다. 9세기경 한 위대한 수학자가 이 신비를 풀기 위해 그때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몇 가지 정리를 발견해 그것으로 숫자와 흥겹게 놀았습니다. 무사 알콰리즈미(Musa al-Khwarizmi)는 칼리프가 바그다드에 설립한 과학연구소인 지식의 전당(House of Wisdom)의 학자였습니다. 칼리프들은 학자들이 전 세계의 모든 지식을 아랍어로 번역하고 축적하기를 바랐고, 알콰리즈미는 고대 수학을 연구했습니다. 그가 맞닥뜨린 고대 학자 가운데는 그리스의 디오판토스(Diophantos)가 있었습니다. 그는 주어진 몇 가지 조건을 사용해 미지수를 찾아내는 방법에 관한 책을 썼는데, 이는 바로 방정식이었습니다. 알콰리즈미는 디오판토스의 이러한 업적을 이어받아 방정식을 확장시켜 나갔습니다. 그는 6가지 방정식 형태의 특성과 이를 푸는 방법을 개발해냈습니다. 알콰리즈미의 애초 목적은 가문의 친족관계에 기초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이슬람교 교리, 거래관계, 땅의 용도에 따라 정해지는 골치 아픈 유산분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문제를 두 가지 미지수로, 문장으로, 또한 기하학적인 도표로 나타냈습니다. 그의 저서인 복원과 대비의 계산(A Brief Account of the Methods of al-Jabr and of al-Muqabala), 기하학, 삼각법, 천문학의 발달에 초석을 세웠습니다. 복원(al-Jabr) 이라는 뜻의 아랍어는 새로운 학문 분야인 대수학(algebra)의 이름으로 후세에 전해졌습니다.
화약 개발 - 서기 850년
황과 초석(附石), 숯을 섞으면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요? 당나라의 연금술사들은 불사(不死)의 명약이 탄생하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실망스럽게도, 그 결과물은 그들의 면전에서 폭발했습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연금술사들이 발명한 화약은 세계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발명 초기 불꽃놀이에만 사용되던 화약은, 1100년경부터 군사적인 수단으로도 활용되었습니다. 송나라 군사들은 대나무에 화약과 기름을 채운 일종의 화염방사기를 개발했으며, 이 무기는 진군하는 적들을 격퇴시키는 데 매우 유용하게 사용되었습니다. 곧이어 폭탄이 개발돼 군사 지도자들에게 전쟁에서 아주 효율적인 무기를 얻게 해주었습니다.
농업의 변화
유럽인들에게 첫 식량작물이었던 밀은 고대 시대에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들어왔습니다. 신석기시대의 유럽인들은 트리티쿰(Triticum)이라는 소맥과의 밀을 재배하며 봄에서 가을까지의 농번기를 보냈고, 여름과 겨울의 농한기에는 다른 일을 했습니다. 밀은 땅에서 영양분을 흡수하기 때문에 땅의 영양분이 채워지기를 기다리기 위해 농부들은 두 밭에서 번갈아 농사를 짓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한쪽 밭에서 밀을 재배하는 동안 다른 밭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럽의 경작지에서 밀 생산 규모는 제한적이었고, 중세 시대 초기까지도 상대적으로 수확량이 크게 늘지 않는 정체상태였습니다. 이런 제약 속에서 봉건제도로 운영되는 농장은 효율적이고 상업성이 가능한 형태가 되었습니다. 최상의 자리에 있는 왕이 한 단계 낮은 위치의 영주에게 봉토를 내리고, 그 영주는 다시 봉토의 거주민들과 마을, 농장을 관리했습니다. 자유민들과 농노들은 개인적으로 할당받은 땅을 일구며 작물을 수확했습니다. 그들은 밀로 죽과 빵을 만들었고, 텃밭에서 키운 야채와 집에서 키우는 닭과 돼지 고기로 식생활을 영위했습니다. 농노들은 자신의 소작지를 돌보는 것 이외에 매주 1~2일은 영주의 땅에서 일해야 했습니다. 이런 상황을 바꾼 것은 5가지의 혁명이었는데, 1000년경에 벌어진 이 변화를 두고 '농업혁명' 이라고 부릅니다. 이 중 3가지는 말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힘든 노동을 견뎌낼 수 있는 튼튼한 말을 기른 것, 말의 목에 마구(馬具)를 채운 것, 말발굽에 편자를 끼운 것이다. 이 덕분에 말의 등에 더 무거운 물건이나 사람을 태울 수 있게 되면서 말의 운송능력이 탁월하게 높아졌습니다. 네 번째는 말에게 먹이는 여물의 주요 재료가 되는 귀리를 경작한 것입니다. 이런 혁명들이 한데 모여 무거운 바퀴가 달린 쟁기로 밭을 갈 수 있는 수준으로 발전했습니다.
마침내 농민들은 한 밭에서 귀리, 완두와 같은 콩과의 작물 세 가지를 돌아가며 재배하는 방식으로 옮아갔습니다. 사철 전체 경작지 중에 놀고 있는 땅의 규모가 3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들었다는 뜻입니다. 이로 인해 식량 생산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남는 식량을 다른 생활 편의품과 바꾸거나 식량이 모자란 지역에 파는 상거래가 활성화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유럽 전반에 시장경제가 형성되면서 르네상스의 기운이 돋아 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중세 시대의 말기에 들어서면서 주변 각 지역의 다양한 특산품들이 전해져 유럽의 생산품에 풍미가 더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예컨대 이슬람권에서 가지와 수박이 들어와 프랑스와 스페인 등 남유럽 지역에서 재배되기 시작했습니다. 남유럽과 동유럽 지역에서는 와인 생산량이 늘어났고, 이는 더 많은 경작지들을 포도밭으로 바꾸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영국은 포도를 키우기에는 너무 북쪽에 있었던 까닭에 대신 양떼를 키울 수 있는 목초지들이 늘어갔고, 이는 이윤을 남길 수 있는 양털 거래가 활성화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