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시대 중 서기 600년대에는 어떠한 일들이 있었는지 궁금하시죠?
중세시대의 이 시기에는 엘니뇨 현상에 의해 두 문화가 돌연 몰락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중국의 당나라가 서기 600년대에 건국되었습니다. 또한 무함마드의 헤지라(이주)가 결행되었고, 카멜 전투가 일어났었죠. 이러한 역사적 사건들 외에 수니파와 시아파 두 개의 이슬람교에 대해서도 알아보려고 합니다.
1. 엘니뇨에 의한 두 문화의 몰락 - 서기 600년
페루의 해안선을 따라 두 개의 문명이 번성했습니다. 북부 해안을 따라 위치한 모체(Moche) 지역은 거대한 도시의 식량을 해결하기 위해 땅콩, 옥수수 등을 재배하는 지역의 관개시설에 물을 공급하는 수로를 건설할 정도로 선진화된 문명을 꽃피웠습니다. 그들의 제사장은 거대한 피라미드 사원에서 의식을 주재했고, 통치자들은 값비싼 보석으로 치장했습니다. 그 남쪽에는 나스카(Naska) 문화가 발흥해 사람과 야생생활의 문양을 새기고 4가지 색깔로 채색한 용기를 만들 정도로 선진 문화를 꽃피웠습니다. 그들의 가장 매혹적인 창작품은 아직도 페루 남부의 사막을 장식하고 있는 '나스카 라인(Nasca Lline)'이라는 지상 회화입니다.
그러나 두 문화는 600년경에 돌연 몰락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기후학자들과 지리학자들은 바닷물의 온도가 상승하는 엘니뇨(RI Nino) 현상 때문에 대재앙의 홍수가 일어나는 등 기후가 불안정해지면서 두 문화권을 고사시킨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2. 중국 당나라 건국 - 서기 618년
중국의 당(唐) 나라 시대(618~907년)는 다른 왕조 시대와 비교할 때 가장 높은 수준의 문명을 꽃피운 황금기였습니다. 당나라를 세운 이연(李淵· Li Yuan)은 수나라의 고위 관료였으나 정국 혼란을 수습하며 한나라가 멸망한 220년 이후 처음으로 다시 중국을 통일했습니다. 수나라에서 이연은 반란군을 진압하며 명성을 날렸습니다. 그러나 617년 그는 야심가였던 아들 이세민(李世民. Li Shimin, 당 태종)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당 왕조를 세우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후 이세민은 큰형을 살해 한 뒤 집권한 지 6년밖에 지나지 않은 아버지 이연을 압박해 왕위를 이어받았습니다. 이세민은 피로 물들이며 왕위에 올랐지만 중국의 위대한 황제 중 한 명으로 꼽힐 정도로 후대에 모범적인 치세를 펼쳤습니다. 그는 유능한 참모들을 측근에 배치해 국가 제도를 발전시켰습니다. 중앙정부는 물론 지방을 정비했고, 새로운 통화를 유통시켰으며, 공립교육기관을 세웠습니다. 그의 중앙집권적인 통치방식은 왕권을 강화하고 효율적인 통치를 가능하게 했고, 영토를 서역으로 넓히는 시대를 열었습니다. 이를 기반으로 시문학과 미술, 음악이 번성했습니다.
당나라 시대에 중국은 문명의 최고점에 이르렀습니다. 통치자들은 수도인 장안(長安, 현재 시안)부터 실크로드와 대운하를 통한 서역과의 교역을 장려했습니다. 이 교역로를 따라 이주민이 늘어났고, 새로운 관료제도를 도입해 젊은이들이 신분에 상관없이 관직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기도 했습니다.
3. 무함마드의 헤지라(이주) - 서기 622년
예언자 무함마드의 메시지는 명확했습니다. 다신주의는 본질적으로 죄악이며, 알라(Allah)를 섬기지 않으면 영원히 저주를 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무함마드는 이렇게 설교하며 아랍 부족들 사이에서 신도를 모았고, 노예를 해방시켰습니다. 그러나 그의 친족들과 다른 부족장들은 그의 말을 심각한 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은 무함마드가 전통적인 종교의 신전뿐만 아니라 깊은 존경을 받는 조상들을 모독한다며 격분했습니다. 무함마드의 인기가 높아갈수록 그를 따르는 신도들에 대한 압박과 박해가 더 심해졌습니다. 그러나 인근 도시 야스리브(Yathrilb)에 이미 씨앗이 뿌려졌습니다. 야스리브는 이슬람 교의 도시였습니다. 도시의 대표들은 수많은 신도들을 이끌고 메카로 대이동을 했고, 무함마드에게 지도자가 되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622년 드디어 헤지라(Hegira, 이주)가 결행되었고, 야스리브는 '예언자의 도시(the city of the Prophet' 라는 뜻의 메디나(Medina)로 불리게 됩니다. 이때가 이슬람력(헤지라력)의 원년으로, 이슬람 역사에 새로운 장을 연 시작점이었습니다.
이슬람교인들은 메디나에서 다수파로서 예전에는 누리지 못했던 정통성과 정치적 권력을 향유했습니다. 예언자인 무함마드는 교리에 바탕을 둔 법률을 정립했으며, 최고의 심판자이자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이슬람교인들은 무함마드가 메디나 주민들과 맺은 메디나 헌장(Constitution of Medina)을 이슬람교 사회의 가장 중요한 교리로 받아들여 이상적인 생활원칙으로 존중하고 있습니다.
메카에서 북쪽으로 200마일가량 떨어진 야스리브는 예언자의 도시라는 의미의 메디나운나비(Medina un-Nabi, 영어명 Medina)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이슬람교인들에게 메디나는 메카(Mecca)에 이어 두 번째로 중요한 도시이며, 이곳에 무함마드의 묘가 있습니다.
4. 카멜 전투 - 서기 656년
이슬람교는 교세가 확장되는 만큼 하나의 제국으로 급속히 성장했습니다. 무함마드와 그의 두 후 계자는 아랍의 부족들을 군대화했으며, 그 들에게 정복욕을 심어주었습니다. 그들의 군대는 큰 성공을 거두어 곧 이집트 국경부터 페르시아 국경까지 광활한 땅에 신정국가 (神政國家)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세 번째 칼리프는 무함마드가 사망한 뒤 예언자를 따르는 신도들을 누가 통치할지를 두고 분출하는 논란을 잠재우지 못했습니다. 칼리프의 지위를 무함마드의 혈통을 따라 세습할 것인가, 아니면 그에 연관되지 않은 새로운 지도자를 선출할 것인가. 무함마드가 가장 총애했던 부인인 아이샤(Aishah)는 두 번째 의견을 지닌 그룹을 이끌었습니다. 그녀는 무함마드의 양자인 알리(Ali)가 칼리프의 법통을 잇는 데 반대했습니다. 그녀와 추종자들은 군사를 일으켰고, 오늘날 시리아와 이라크 지역인 유프라테스 가에서 알리의 군대와 마주쳤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아이샤는 계속되는 전투에서 낙타 위에 올라탄 채 군대를 지휘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훗날 이 싸움은 '낙타 전투(카멜 전투, Battle of Camel)'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양측은 치열한 전투 끝에 휴전에 합의했지만, 이 전투는 이른바 이슬람교 내부의 오랜 내전(서기 656~661년)의 전초전이었습니다.
이 시기 이슬람교는 근본적인 분리가 이뤄집니다. 아이샤의 추종자들은 수니(Sunni) 파, 알리 진영은 시아(Shite) 파 교도가 됩니다.
5. 수니파와 시아파
이슬람교의 분파가 생겨난 것은 누가 신도들의 지도자가 될 것인 지를 둘러싼 논쟁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아랍 부족들의 관습에 따르면 새로운 지도자는 원로회의에서 선출되며 부족 원로들의 존경을 받아야 합니다. 대체로 신도들은 칼리프가 전체 공동체의 공감대를 통해 선출돼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날 이런 생각을 지닌 수니파 신도가 전체 13억 이슬람교인 중 90%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와 달리 소수파이면서도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시아파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직계혈족 중에서 법통을 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은 카멜 전투에서 무함마드의 조카이자 양자인 알리를 추종했던 분파로, 오늘날 전체 이슬람교도의 10%를 차지합니다. 수니파와 시아파는 역사적 사건에 대해서도 다르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4대 칼리프였던 알리는 반란을 통해 권좌에 올랐으나 암살을 당해 종말을 맞았으며, 그 덕분에 우마야드(Umayyard) 칼리프가 들어섰습니다. 680년에는 그의 아들 후세인(Husayn)이 칼리프에게 맞섰다가 수난을 당했습니다. 알리로 거슬러 올라가는 시아파의 정통성에는 살해극이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각 분파는 내부적으로 자신들의 신학적 · 정치적 주장을 지속적으로 강화했습니다. 시아파는 무함마드의 정신적인 유산이 혈통으로 이어진 최고 지도자인 이맘(imam)들에게 전해지고 있는 만큼 그 승계자들만이 유일하게 코란 해석과 이슬람 사회 통치의 권능을 지니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맘들은 시아파에서 최고의 권위를 상징하지만, 수니파의 교리가 지배하는 시대에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한 채 침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939년까지 12명의 이맘들이 시아파의 교리를 지켰는데, 시아파들은 그때까지 알라 신이 12번째 이맘을 숨겨주기 위해 기적을 행한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시아파의 교리는 12번째 이맘이 세상의 종말에 다다랐을 때 돌아와 이슬람 왕국을 바로잡는다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수니파는 어떠한 영적인 지도자나 시아파의 이맘들보다도 코란(Koran)을 더 숭배했습니다. 신앙생활의 정수가 코란에 들어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코란의 교리에 충실하면서 사회적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 권력자에게 충성심을 보여주었고, 그러한 권력자를 칼리프의 신 성한 통치권을 보여주는 증인으로 인식했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두 분파의 지도력에 대한 인식 차이가 이슬람 세계를 역동적으로 만들었는데, 대개는 수니파가 시아파를 장악했습니다. 이런 흐름에 가장 예외적인 경우는 페르시아에서 16세기 시아파의 사파(Safavid) 왕소가 이란을 세워 시아파 문화의 중심으로 키운 것입니다.
현대에 들어 수니파와 시아파는 거지와 왕, 온건주의 자와 극단주의자, 아랍, 페르시아인, 남동 아시아인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회계층으로 엇갈려 있습니다. 또한 많은 지역에서 이들 분파 간의 결혼이나 개종을 인정하는 경우가 늘고 있습니다. 더욱이 수니파도 시아파만큼이나 알리를 숭배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오늘날 이라크와 같은 지역에서는 분파 간의 원한관계가 깊어져 테러와 내전을 격화시키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