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시대 서기 1000년대에는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바이킹이 아메리카 대륙에 첫 발을 내디뎠고, 연금술에서 시작된 화학 분야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아랍의 과학자가 시력의 원리를 밝혀내기도 했고, 페르시아의 의사에 의해 의학정전이 출간되었습니다. 또한 이 시기에 윌리엄 1세는 영국을 정복하고, 황금 제국이었던 고대 가나 왕국이 몰락하는 사건이 있기도 했고, 제1차 십자군 전쟁이 발발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서기 1000년대 역사 속 사건들에 대해서 가볍게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메리카 대륙 발견
서기 1000년경, 한 유명한 바이킹이 북아메리카를 발견하고, 그가 처음 북아메리카 땅에 발을 내딛었다고 역사가들은 말합니다. 고고학적인 증거에 의하면 바이킹들이 1000년경 캐나다 서부 해안에 상륙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또한 아이슬란드의 전설에서는 붉은 에리크의 둘째 아들 레이프가 원정대를 이끌고 탐험 도중 포도나무가 풍성한 땅을 발견했고, 그 땅의 이름을 빈랜드라고 지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는 바이킹이 아메리카 대륙에 정착하지는 않았지만 바이킹의 행로가 북아메리카에 변화를 몰고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화학 연구의 시작
9세기 중후반부터 중국과 서아시아 지역에서는 연금술이 만개했습니다. 연금술사들은 금을 만들거나 영원한 젊음을 유지할 수 있는 비법을 찾으려고 실험을 하다가 의외의 결실을 얻었습니다. 그들은 깨닫지 못했지만, 이러한 실험들은 현대 과학에서 가장 중요한 분야 중 하나인 화학 연구의 기초를 쌓게 했습니다. 1000년이 시작되면서 아랍 지역의 연금술사들은 실험에 필요한 도구들을 발명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금속에 대한 지식이 해박해지면서 금속 물질에 열을 가하거나 다른 화합물을 더한 물질들을 다루는 데 능숙해졌습니다. 알코올, 엘릭시르와 같은 화학 물질 명칭은 아랍에서 생겨났으며, 이 시기는 화학의 중요한 탄생기였습니다. 이후 1000년이 지난 뒤, 화학자들은 연금술에 기초한 지식을 바탕으로 현미경과 같은 도구를 이용하여 원자력 시대를 열었습니다.
시력의 원리
서기 1006년 경, 이슬람 학자들은 반사광, 무지개, 렌즈, 거울, 안구 등 광학과 관련된 현상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특히 생리학자들은 신체기관인 눈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해부를 하기도 했습니다. 아랍의 과학자 이븐 알 하이삼은 시력에 대한 개념을 완전히 바꿔놓았습니다. 그는 눈이 빛을 내보내 사물을 본다거나, 사물 자체가 눈에 직접 그 형태를 보여준다는 옛 이론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알 하이삼은 눈이 빛을 내보내는 것이 아니라 빛이 눈으로 들어오는 것이며,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은 빛을 반사한 피사체의 상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알 하이삼은 자신의 이론을 '광학의 서'라는 책으로 출판했는데, 이는 이슬람 최고의 역작 중 하나로 꼽히고 있습니다. 이 저서는 후대의 로저 베이컨과 요하네스 케플러와 같은 과학의 혁신을 일으킨 인물들에게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의학정전 출간
서기 1020년, 페르시아의 의사이자 철학자였던 이븐 시나는 모든 의학 분야에 대한 탐구를 했습니다. 생리학과 해부학, 치료요법에 대한 그의 연구는 저서 '의학정전'에 수록되었으며, 이 책은 서양 의학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븐 시나의 의학적 업적은 하나하나 나열하기 힘들 정도로 많습니다. 몇 가지만 추려보자면, 신체의 통증과 신경 간의 관계를 설명하고, 결핵이 전염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밝혀냈으며, 정신 건강이 신체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최초로 인정한 의학자였습니다. 규모나 범위 모든 면에서 백과사전 수준인 그의 저서는 이슬람과 기독교 세계에서 곧 의학의 기본 지침서가 되었습니다.
윌리엄 1세 영국 정복
오늘날의 영어(English)는 게르만족의 영어와 라틴계의 프랑스어가 섞여서 만들어진 언어입니다. 하지만 그 영어는 노르망디 공국의 윌리엄 1세가 영국을 정복하지 않았다면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서기 1006년 색슨족의 영국은 군대의 전투력이 약해지면서 위기를 맞고 있었습니다. 동쪽과 남쪽에서 스칸디나비아의 왕들과 프랑스령의 노르망디 공국의 침공이 임박한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서기 1066년에 영국 웨섹스 왕가의 에드워드가 죽자, 의동생 해럴드 2세가 왕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윌리엄은 에드워드가 생전에 자신에게 왕위 상속을 약속했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수천 명의 노르만 기사단을 이끌고 영국을 침입했습니다. 해럴드의 보병대는 윌리엄의 기사단에 적수가 되지 못했습니다.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해럴드와 맞붙은 윌리엄 군대는 왕권을 원하던 노르망디 공국의 든든한 지원을 받은 상태였으며, 특히 윌리엄은 로마 교황의 지지까지 얻은 상태였습니다. 이러한 전쟁 중 해럴드는 눈에 치명적인 화살을 맞았고, 정복자 윌리엄은 결국 영국의 왕위에 올라 노르만 왕조를 열었습니다. 그의 대관식은 1066년 크리스마스에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거행되었습니다. 윌리엄은 영국의 기존 귀족과 성직자들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프랑스인들을 앉혀 영국 사회의 최상층을 새롭게 구성했습니다. 또한 영국의 전통관습을 존속시키긴 했지만, 절대왕권을 확립할 수 있는 노르망디 공국 방식의 봉건제를 통해 각 지방을 관리했습니다. 이렇게 윌리엄의 정복 20년 만에 영국은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 중 하나로 성장했습니다. 문화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노르만족과 색슨족의 융합은 더디게 진행되었습니다. 세대가 지나갈수록 왕실의 관행과 음악, 예술은 프랑스식으로 변했고, 학자들은 계속해서 라틴어로 책을 썼습니다. 하지만 색슨족 농부들의 삶은 정복 이후 그다지 변하지 않았습니다. 영주의 식탁에서는 프랑스어로 대화가 이뤄졌지만, 그 농장 외양간에서는 고대 영어였던 게르만어로 대화하는 소리가 계속 들려왔던 것입니다. 영국은 정복자 윌리엄의 통치를 받는 동안 번성했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두 민족 간의 결혼이 일반화되고, 이는 문화와 언어까지 변화시켰습니다. 몇 세기 지나지 않아 제프리 초서는 캔터베리 이야기(The Canterbury Tales)를 완성, 명백하게 라틴계 언어의 뉘앙스가 섞인 게르만어, 즉 중세 영어를 정착시키게 됩니다.
황금 제국, 고대 가나의 몰락
아랍 지역에서 낙타를 타고 혹독한 사하라사막을 건너 남쪽에 이르면 아프리카 황금 왕국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고대 가나(Ghana) 왕국으로, 단순한 장식에도 금을 이용할 정도로 가나에는 금이 풍부했으며, 소금과 다른 일용품을 얻기 위해 강에서 금을 채취해 아랍인, 베르베르인들과 교역했습니다. 이를 통해 부를 축적한 가나는 7~11세기에 가장 번성했습니다. 그러나 가나 왕국은 이슬람교의 과격파 알모라비(Almoravids) 세력이 성전을 일으켜 북쪽에서 침략해오자 결국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1076년 알모라비 세력은 가나 왕국의 수도 쿰비(Kumbi)를 점령, 이슬람 제국에 복속시켜버렸습니다. 이렇게 가나 왕국은 이름만 남은 채로 조금 더 유지됐지만, 곧 이슬람교인의 정착지와 사원들이 들어선 이슬람 사회가 되어 버렸습니다. 학자들은 번성했던 가나의 문명이 인구 과밀과 자연 자원의 고갈로 인해 쇠락한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추후 13세기 사하라사막 남부 아프리카에서 최초의 왕국인 가나의 영토는 더 부유했던 말리(Mali) 제국이 차지했습니다.
제1차 십자군 전쟁 발발
교황 우르바노 2세는 안팎으로 위기를 맞고 있었습니다. 그의 든든한 지원국인 프랑스 인구가 증가하며 사소한 일로 내정이 시끄러웠으며 콘스탄티노플에 서는 이슬람교의 셀주크(Seljuk) 왕조와 맞서기 위해 원조를 요청해왔습니다. 이슬람교도가 성지인 예루살렘을 차지하면서, 그곳을 찾아가는 기독교 순례자들이 피해를 입고 있다는 얘기도 들려왔습니다. 교황은 이러한 위기 속에서 기회를 찾아냈습니다. 1095 년 교황은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성지순례를 통해 예루살렘을 이슬람교도의 통치 하에서 해방시키자며 유럽의 기독교인에게 전쟁을 선동했습니다. 그는 전쟁에 참가한 기독교 전사들은 죄를 사면받고 찬양받을 것이라고 공표했고, 이에 수천 명의 군사들이 그 부름에 응해 모험과 구원의 길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제1차 십자군 전쟁(서기 1095~1099년)에서 기독교 군대는 소아시아 지역에서 많은 영토를 점령하고 십자군 국가를 세울 정도로 성공을 거뒀습니다. 1099년 그들은 유럽과 이슬람의 예술작품에 묘사될 정도로 무자비한 학살까지 감행하며 예루살렘을 탈환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이 차지한 예루살렘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습니다. 십자군 전쟁이 유럽에 미친 영향은 이루 열거하기 힘들 정도인데, 그중 가장 중요한 결과는 십자군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귀국하면서 동방의 문화와 음식을 들여왔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때까지 폐쇄되어 있던 교역료가 열렸으며, 이 전쟁으로 인해 이슬람 통치자들은 매번 시도하던 유럽 공격을 멈추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십자군 전쟁에 관한 이야기가 중세 문화의 중심 주제가 되었다는 점이 이 전쟁의 중요한 결과 중 하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