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중세 시대 이야기로 찾아왔습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서기 900년대에 일어났단 역사적 사건들을 몇 가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천일야화의 근원 설화로 추정되는 세헤라자데, 풍차의 사용, 송나라 건국, 블라디미르 1세가 기독교로 개종한 사건, 마야 문명의 몰락 등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세헤라자데 - 서기 900년경
9세기 말의 한 고문서에는 디나자드라는 이름의 한 소녀가 또 다른 소녀인 세헤라자데에게 이야기를 해달라고 하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이 고문서는 서아시아의 대표적인 대작 천일야화(The Thousand and One Arabian Nights)의 근원 설화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이야기 속에 또 다른 이야기가 들어 있는 천일야화는 샤리아르 왕이 왕비의 부정을 알게 되자 분노한 나머지 왕비를 처형하고, 이후 매일 밤 새로운 처녀와 하룻밤을 지낸 뒤에는 어김없이 죽여버린다는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현명한 세헤라자데는 그 왕과의 결혼식날 밤, 여동생과 함께 처형당할 위기에서 목숨을 구하게 됩니다. 그녀는 왕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는 결론을 알려주지 않은 채 다음날 저녁 다시 이야기를 이어가겠다고 말합니다. 그녀의 이야기에 매료된 왕은 결말을 듣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녀를 살려주게 되고, 매일 밤 이야기를 들으며 왕은 결국 그녀를 사랑하게 됩니다. 사실 천일야화는 그 속의 수많은 밤처럼 많은 개작 본들이 존재합니다. 이 작품의 역사적인 중요성은 인도와 페르시아, 터키, 이집트, 이라크 등에서 온 다양한 설화가 공존하고 있고, 그 이야기들은 이슬람 사상으로 통일된 새로운 문화를 반영한다는 점입니다. 또한 성숙한 이슬람 서아시아의 관습과 사회적 관행에 대한 통찰력도 제공합니다. 천일야화는 알라딘과 신밧드, 알리바바와 같은 민중적 영웅을 탄생시켰고, 오늘날까지 전 세계적으로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습니다. 차이코프스키와 림스키 코르사코프 같은 음악가들에게도 영감을 주어 동양적인 주제의 음악을 작곡하게 했습니다.
풍차 등장 - 서기 915년
이 시기에는 바람을 동력화하는 데 성공하면서 농업에 급격한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더 일찍 풍차가 발명된 흔적이 있기는 하지만, 915년의 비문은 페르시아 농부들이 이미 풍력을 활용해 곡식을 갈고 밭에 물을 끌어다 댔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징기즈칸의 군대는 페르시아의 풍차 장인을 생포해 중국으로 보내서 기술을 전파시켰으며, 기독교의 십자군은 그 기술을 유럽으로 가져갔습니다.
중국 송나라 건국 - 서기 960년
송나라 시대(서기 960~1279년)에 중국인들은 생활여건이 윤택해지자 높은 교육수준에 바탕을 둔 문화를 꽃피웠습니다. 조광윤이 창건한 송나라는 공자의 유교사상에 기반을 두고 문치주의와 강한 관료제를 통해 번성을 꾀했습니다. 농업기술의 발달로 벼를 빠르게 자라게 할 수 있었고, 곧 이모작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를 통해 생산된 잉여농산물은 주민들에게 충분한 식량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화폐경제와 새로운 형태의 교역 발전을 가능하게 해 주었습니다. 당시 젊은이들이 중앙정부의 관료가 되려면 한층 엄격해진 과거시험을 통과해야만 했기 때문에 5세 정도의 어린 소년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공자의 고전을 암기하거나 필사하는 데 썼습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여성의 경우 교육기회는 물론 자유가 줄어들었으며, 발이 크지 않도록 헝겊으로 싸매는 전족의 풍습도 이 시기에 등장했습니다. 송 왕조는 예술가들의 활동을 지원해 수준 높은 예술로도 명성을 얻었습니다. 송나라 시대의 섬세한 회화, 시, 음악과 도자기들 은 중국의 평화롭고 목가적인 분위기를 섬세하게 표현해냈습니다. 송나라에서는 당나라 때 발명된 화약을 기초로 화기 개발이 두드러졌습니다. 당시 무기 중에는 화염방사기뿐 아니라 소총과 화전, 대포의 전신 등이 있었습니다.
블라디미르 1세의 기독교 개종 - 서기 987년
키예프 공국(Kiev Rus)은 모피·밀랍 등 북쪽 지방의 일상용품과 문화가 풍요로운 곳이었습니다. 980년 비(非)기독교인이었던 블라디미르 (Vladimir) 대공은 집권 후 영적인 이유뿐만 아니라 외교적인 이유로 남쪽 지역의 종교에 흥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987년 러시아의 문화적인 특성이 형성되는 순간이 다가오게 됩니다. 원정을 마치고 돌아온 블라디미르는 키예프 국민들에게 기독교를 제외한 다른 종교에 대해 혹평을 내렸는데, 민속학에 따르면 블라디미르는 이슬람교가 음주를 금지했기 때문에 이 종교를 거부했다고 합니다. 이미 비잔틴제국과 군사원조를 통해 유대를 이어왔던 블라디미르는 콘스탄티 노플을 자신의 영적 지침으로 삼았습니다. 그는 비잔틴제국의 공주와 결혼하며 기독교(그리스 정교)로 개종했으며, 러시아 정교를 국교로 제정했습니다. 현재 러시아인들은 성 블라디미르를 숭배하며 7월 15일을 그의 축일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마야 문명의 몰락 - 서기 987년
콜럼버스의 발견 이전에 번성했던 아메리카대륙의 문명 가운데 유독 마야(Maya) 문명에 관한 모든 것이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이유는 단
하나, 그들에게 문자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들의 난해한 상형문자는 유카탄(Yuca| tan) 반도의 정글 구석구석에 산재해 있는 사원과 탁자, 도기류에 새겨져 있습니다. 학자들은 현재도 그 상형문자들을 해독하고 있는데, 그들이 정교한 역법을 가지고 있었으며 천문학에도 상당히 조예가 깊었지만 때로는 신에게 제물을 바쳤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3세기부터 9세기까지의 고전기에는 수레바퀴나 아치도 없이 웅장한 신전과 아찔하게 솟은 피라미드 등 거대한 건축물을 지었으며, 주변국들과 옥 같은 값비싼 품목을 거래했습니다. 치첸이트사(Chichen Iza)와 티칼(Tikal) 같은 사원이 들어선 밀집지역은 수십만 명이 살 수 있는 도시였으며, 거기에는 이웃 부족에서 끌려온 노예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척박한 지역에서 농사에만 의지하며 거대한 구조물을 세우는 데 엄청난 노동력을 동원했던 이 제국은 당연하게도 오래 지속될 수 없었습니다. 농작물인 옥수수의 경우 한 사람의 하루 섭취 정량이 680g 정도인데, 열대우림 지역에서 이 섭취량을 충족시키는 데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9세기 중반 마야의 밀집지역은 점차 쪼개져 작은 규모의 우림 지역 정착지로 나뉘기 시작했다.
오늘날 멕시코 북쪽에서는 또 다른 부족이 출현했습니다. 유카탄반도를 향해 밀고 내려간 전사 부족, 톨텍(Toltec)족이었습니다. 그들은 987년 마야 문명의 중심부였던 치첸 이트사를 침략해 마야인들의 땅에 정착했습니다. 그다음 세대에 이르러 마야와 톨텍은 혈통과 전통이 융합되었으며, 비록 마야 문명이 남아있긴 했지만 이 시기의 후(後) 고전기에는 그 이전만큼 번성하진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