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시대에 이어서 중세 시대에 일어났던 중요한 사건들을 하나씩 살펴보려고 합니다.
'고대 시대' 역사가 궁금하신 분들은 아래 포스팅을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2022.05.11 - [세계 역사의 흐름과 변화/고대 시대 (선사시대~서기400년)] - 고대 세계 1편 - 생명의 시작
그럼 바로 중세 시대에서 서기400년대에는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1. 섬에 도착한 뱃사람들 - 서기 400년
뱃사람들은 조각배를 타고 노를 저으며 오로지 별에만 의지한 채 광활한 대양을 건넜고, 작은 섬들로 이루어진 폴리네시아군도에 도착했습니다. 5세기로 접어들 무렵 하와이 섬에 도착한 이주민들은 계단식 밭을 일구고 토란 등의 새로운 작물을 재배했습니다. 이주민들은 섬에서 일어나는 화산 폭발이나 홍수와 같은 자연 현상들을 신이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신을 숭배하는 예식인 훌라댄스가 생겨났고, 이는 천 년 이상 하와이의 전통문화로 전승되고 있습니다.
하와이 사람들은 널빤지에 올라 타서 파도를 타는 윈드서핑의 주역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윈드 서핑은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 중 하나입니다.
하늘의 별이 사람들을 하와이 섬으로 인도했듯이, 하와이 사람들은 '인간'들을 별의 세계로 이끌었습니다. 하와이의 빅아일랜드에 위치한 마우나케아 천문대는 11개국에서 모인 천문학자들이 운영하는 세계 최대의 관측소입니다. 마우나케아의 꼭대기는 지상 위 대기권의 40% 지점에 위치해 있어서 대기와 햇빛에 의한 천문 관측 장해 요소를 없애주고 청명한 하늘을 볼 수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이곳은 천문대의 입지로 최상의 장소입니다. 그동안 천문학자들은 이러한 산 정상의 확 트인 공간에서 태양계의 위성과 머나먼 거리의 은하계까지 모든 별들을 발견했습니다.
2. 정당한 전쟁에 대한 기록 - 서기 400년
'전쟁' 이라는 폭력적인 행위가 어떤 조건에 의해 갈등 종결의 수단으로 용인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은 천 년 동안 인류의 양심을 자극해왔습니다. 기원전 1세기경 로마의 키케로는 군사력의 활용을 정당화하는 이론을 세웠고, 오늘날의 학자들은 여전히 그 이론을 가지고 논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 이론의 의도는 불가피한 폭력을 막자는 데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군 전쟁부터 미국의 이라크 침공까지, 갈등 해결을 명분으로 내세운 '정당한 전쟁'이 빈번하게 벌어졌습니다. 현대에서 정당한 전쟁에 대한 이론은 5세기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가르침과 결합된 것입니다. 그는 저서 '신국론'에서 기독교 신앙과 폭력 간의 태생적 갈등에 대해 서술했습니다. 그는 침략 전쟁이 용인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방어와 순수성을 보호하기 위해 종종 전쟁이 필요하다는 이론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 가운데 지금까지 영속되고 있는 지침이 있는데, 이는 충분히 고려한 정의를 위해 전쟁을 벌이고 있는 양 진영은 중립적인 진영을 공격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스위스가 중립국을 선언하는 역사적 논거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정당성을 내세우는 전쟁은 4가지 기본 원칙이 지켜져야 합니다. 우선 전쟁은 적절한 권한에 의해 공개적으로 선포되어야 합니다. 또한 전쟁은 정당한 목적에 따라 수행 되어야 합니다. 세 번째는 정당한 명분이 있어야 하며, 마지막으로 전쟁의 궁극적인 목표는 정당한 평화를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3. 훈족의 왕, 아틸라 - 서기 404~453년경
유럽인들에게 '천벌'로 불린 아틸라는 옛 로마의 학자들부터 오늘날 할리우드의 영화 감독에 이르기까지 피에 굶주린 정복자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훈족에게 자신들의 역사를 기록할 수 있는 문자가 있었다면 아틸라에 대한 평가는 훨씬 더 정당하게 달라졌을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아틸라에 대한 기록은 훈족이 아닌 그들의 적이었던 로마인들에 의해 쓰였습니다. 심지어 그가 유럽 지역을 위협하던 시절에 쓰인 것뿐이어서 오늘날 '아틸라'라는 이름은 야만적인 폭력의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아틸라는 유목민 훈족의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왕이었습니다. 훈족은 4세기경 중앙아시아를 벗어나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유럽 도시들을 하나씩 점령했습니다. 훈족은 말 안장에 달아 말의 양쪽 옆구리로 늘어뜨린 등자를 발명했는데, 이 덕분에 훈족은 말을 안정적인 자세로 탈 수 있었습니다. 이 작은 발명품은 훈족의 기마부대 전투력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말을 탄 채로 적들을 상대로 칼과 창을 휘두르거나 활을 정확하게 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기마부대 전사들은 로마 제국 전역을 누비며 공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아틸라와 10만명의 훈족 군대는 오늘날의 프랑스, 벨기에, 스위스로 이어지는 궤적을 따라 유럽을 휩쓸었습니다.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훈족은 451년 갈리아의 샬롱 외곽 카탈라우늄 평원에서 서고트족과 로마 제국 연합군에 의해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아틸라는 다음 해에 북이탈리아에 침입하여 로마를 위협했으나, 로마 교황 레오 1세의 설득을 받아들이고 철군했습니다. 그후 본국으로 돌아가 다시 동로마 침입을 기도하던 시기에 급사하는 바람에 대제국도 함께 붕괴되었습니다.
이렇듯 훈족이 유럽 사회에 입힌 피해는 심각하고 거대했었습니다. 훈족은 80년 동안이나 지속적으로 게르만족을 위합하여 라틴 유럽으로 밀어냈으며, 로마 제국의 군사력을 약화시켜 위태롭게 만들었습니다.
4. 로마 제국의 멸망 - 서기 476년
서유럽은 수십 년간 이민족의 침입에 시달리며 살았습니다. 로마의 경우 410년에는 서고트족, 455년에는 반달족에게 유린당하면서 쇠락해갔습니다. 한때 가장 큰 도시였던 로마는 결국 고트족의 수도이자 서로마제국의 새로운 거점이 된 도시 라벤나에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5세기경 권좌에 앉았던 로마 황제들은 여리고 약한 인물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은 게르만족 장군들과 지휘관들의 꼭두각시였고, 그 시기 세력을 확장한 콘스탄티노플의 동로마제국과도 긴장이 고조됐었습니다. 476년에는 게르만 부족의 왕자였던 오도아케르가 라벤나를 점령한 뒤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를 폐위시켰고, 스스로 이탈리아의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는 공식적으로는 유일하게 남은 로마 제국인 동로마 황제의 부왕으로 행세했습니다.
막강했던 로마 제국의 건축 기술, 농업 체제, 도로, 그리고 공교육 제도는 제국의 멸망과 함께 사라졌고, 뒤이어진 암흑기가 지나서야 이 시대를 깨려는 근대 학자들을 인도하기 위한 지침의 형태로 부활하게 됩니다. 유럽의 결집력도 사라져 작은 부족들로 나뉘었으며, 그 경계를 가로지르는 유일한 힘은 로마 가톨릭 교회뿐이었습니다. 이는 봉건주의 시대를 열었으며, 중세 유럽을 특징하는 사회적 체계가 되었습니다.
5. '성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해 좀 더 알아보기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는 중세 시대의 특징을 형성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사상가입니다. 북아프리카 출신의 이 사상가는 고대 학문과 기독교 성서 간의 견고한 다리를 구축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남긴 위대한 저작들은 500만 자 이상의 뛰어난 내용으로 오늘날까지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가장 큰 영향을 준 개념은 원죄(original sin)라는 것입니다. 그는 인간이 본성적으로 선하다는 견해를 거부했습니다. 대신 성경을 근거로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죄를 지었으며, 오로지 신의 은총에 따라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교회가 모든 사람을 수용하는 보편성을 지녀야 하고, 성직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포함해 보통 사람들 사이에서 봉사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인류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었습니다. 기독교 교회에서는 오늘날까지도 "죄인은 사랑하고, 죄를 미워하라(Love the sinner and hate the sins)"는 그의 금언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의 저작들 덕분에 기독교는 쇠락해가는 로마 제국을 넘어 게르만 부족들에게로 뻗어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의 관점은 이후 500년간 유럽이 로마 가톨릭교로 개종하는 데 견인차 역할을 했습니다. 수도원에서 은신하고 있는 수도승들이 고전문학을 구제했을지는 모르지만, 세속에서 봉직한 수도승들은 종교로써 기독교를 구제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또한 서구 세계가 발전한다는 비전을 제시했습니다. 그리스와 로마의 철학자들은 역사의 흥망이 주기적으로 반복된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유대교에서 주장하는 시간의 직선 개념을 믿었습니다. 인류가 위대한 영광에 이르는 길을 향하고 있다는 그의 견해는 서구 사회의 핵심적인 인식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우리는 항상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 있으며, 그 발전이 영원히 지속된다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가장 유명한 저작인 "고백록(Confession)"은 교화된 방탕자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합니다. 현대의 몇몇 정신분석 학자들은 이 내용을 해부해 방탕한 주신제와 동성애를 암시하는 힌트를 찾아냈지만, 사실 이 책은 그가 쓴 대로 한 인간이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선언한 기록이었습니다. 그가 가톨릭교로 개종하기 전인 16세 때 쓴 이 책에는 성 문제를 논하는 내용이 있으나,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듯이 그가 난교(亂交)를 벌였다는 주장을 확인할 만한 근거는 없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깊이 사랑했던 한 여인과 15년 간의 충실한 관계에 대해 이야기했을 뿐입니다.
오늘날 일부 학자들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여성관이 지닌 한계와 반 유대주의를 문제 삼아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여성을 죄에 물든 타락한 존재로 보고, 교회의 권좌에 임명될 수 없도록 교회 규율을 강화했습니다. 그는 또한 자신이 반(反) 유대주의자가 아니었음에도 인간 구제가 교회를 통해서만 가능하며, 모든 이교도를 개종하는 데 교회의 권한을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구세주(Messiah)로서 예수를 인정한 사람들만이 신국(City of God)에서 주님과 가까운 자리에 앉을 수 있다는 주장도 했습니다. 이러한 그의 글들은 나중에 이단자 탄압과 유대인 축출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되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