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시대 서기 500년대에는 어떤 역사적 사건들이 있었을까요?
수학자들이 '0'이라는 개념을 확립했고, 최초의 십진법 계산 방식이 등장했습니다. '음악'을 기록하기 시작했고 메카의 무함마드가 탄생했으며, 목판 인쇄 기술이 등장했습니다. 베네딕트 수도원과 하기아소피아 성당이 건립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들에 대해 가볍게 알아가는 시간을 갖도록 해보겠습니다.
1. '0'의 등장 - 서기 520년
일반적으로 숫자를 셀 때 최소 단위는 1입니다. 고대의 계산법은 수천 년 동안 1이라는 개념에서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리스와 바빌로니아의 수학자들은 1004 처럼 연속되는 숫자 중에 비어 있는 자릿값을 나타내기 위해 '제로(zero)'와 비슷한 표식을 사용하기는 했지만, 계산할 때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는 '0(零)'의 개념은 없었습니다.
그 시절 인도 북부에서 전성기를 누리고 있던 굽타(Gupta) 왕조의 왕들은 예술과 과학, 그리고 아리아바타(Aryabhata)와 같은 위대한 수학자들을 후원해 추상 수학(abstract mathematics)을 발전시켰습니다. 500년경, 아리아바타는 0을 양의 개념으로 설명했고, 이후 수학자들은 몇 세기에 걸쳐 0을 기반으로 한 덧셈, 뺄 셈, 곱셈의 법칙을 고안해냈습니다. 8세기에 이르러 이러한 인도의 저작들이 아라비아어로 번역되어 이슬람 문화권의 유명한 수학자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이슬람교가 서아시아의 종교로 자리 잡은 뒤 압바스 왕조의 7대 칼리프 알 마문(AI-Mamoun)은 바그다드에 '지식의 전당(House of Knowledge)'을 세워 그리스 문헌 번역과 함께 자유로운 과학 연구를 장려했습니다. 그곳에 모인 학자들 가운데 수학자 알파 리즈미(AI-Khwarizmi)는 인도의 계산법을 더욱 정교하게 다듬었고, 방정식 등 연산 법과 기하학에 대한 이해도를 높여 수학, 지리학, 천문학, 제도 법에 관한 저술을 발간했습니다. 그의 책이 번역이 된 후 전파되면서 서구 사회에 0의 개념이 알려졌으며, 그의 이름은 연산 법(algorithm)과 대수학(algebra)의 어원과 함께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2. 최초의 십진법 계산 - 서기 595년
인도의 수학자들은 10 숫자에 몰두했습니다. 힌두 학자들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큰 숫자를 놓고 놀이를 삼았으며, 방정식도 자유자재로 계산해냈습니다. 숫자에 대한 사랑을 시로 표현 하기도 했습니다.
6세기에 이르러 아리아바타(Aryabhata) 같은 학자들은 중세 시대에 보다 발전된 생활 수단을 선사했습니다. 바로 십진법입니다. 십진법이란 0부터 9까지 10개의 숫자가 각각의 값을 갖는 계산법입니다. 십진법으로 계산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595년 구르자라족의 제명(Guranaa Inscript)으로 불리는 명판에 등장합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인도의 수학자들은 십진법의 셈법을 이용한 복잡한 계산식을 시작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지닌 숫자에 대 한 열정은 기하학과 삼각법 등 수학적 발전을 선도했습니다.
3. 탑(pagoda) 양식 등장 - 서기 520년
중국 진나라와 수나라의 중간 시대인 육조 시대에 아시아의 상징적인 건축물 중 하나인 탑(塔, pagoda) 양식이 등장했습니다. 인도의 사리탑 양식을 수용한 중국의 탑은 사방에서 볼 수 있는 입체적인 형태로, 하늘을 향해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지는 계단식 건축물입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벽돌 불탑인 허난성 숭옥사의 숭악사 탑을 포함해 대부분의 탑들은 불교 사찰에 세워져 있습니다. 숭악사 탑은 유일하게 탑의 외형과 아래층의 평면이 12 각형입니다. 탑의 장식들과 각 기단의 지붕들은 오랜 세월 풍화를 겪었지만, 중국 전탑의 전형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4. 음악 기록 - 서기 521년
로마 말기의 학자 보이티우스는 저서 '음악 입문(De Institutione Musica)'을 통해 고대 그리스의 음악을 중세 유럽에 전했고, 이것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는 음 높 이에 따라 문자를 하나씩 부여했는데, 이것이 바로 A에서 G에 이르는 음계가 되었습니다. 그는 협화음, 음계, 음정에 대한 개념도 정립했으며, 음악의 본질은 신성한 창작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사실 그는 철학자로 더 많이 알려져 있고, 음악이 모든 학문 분야에 산재되어 얽혀 있다고 여기던 전통적인 인식도 고수했습니다. 중세의 학자들은 1천 년 동안이나 그를 음악 이론의 권위자로 인정했고, 오늘날 유럽의 대성당들은 아직도 그의 화음을 전승하고 있습니다.
보이티우스는 투옥돼 있는 상황에서 가장 저명한 저작인 '철학의 위안(Consolation of Philosophy)' 을 남겼습니다. 그는 동(東) 고트 왕 테오도리쿠스에게 중용되었으나, 반역죄로 서기 524년 처형되었습니다.
5. 베네딕트 수도원 - 서기 529년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키케로의 전집들이 오늘날 까지 전해지는 것은 유럽의 한 성자 덕분입니다. 이상 사회를 꿈꾸던 기독교 수도사로 이탈리아 중부 누르시아 출신인 베네딕트(Benedict)는 하느님에게 다다르려는 독립적인 공동체를 일구기 위해 나폴리의 몬테카시노(Monte Cassino)에 수도원을 세웠습니다. 그의 수도원은 곧 사람들로 넘쳐났고, 다른 수도사들도 평생 기도와 노동에 헌신하는 삶을 강조한 베네딕트의 수도원 규율을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베네딕트회 수도원들이 영혼뿐만 아니라 문화유산의 보호시설이 될 것이라는 점은 이 성자도 예견하지 못했던 부분입니다. 로마 제국이 멸망하자 학교와 도서관 들도 황폐화되었습니다. 그러나 수도원이 유럽 전반에서 가장 권위 있는 교육기관으로 성장하면서 수도원 기록실의 필기사들은 고대 문헌들과 초기의 기독교 복음서들을 필사했고, 거기에 윤문까지 했습니다. 이 자료들은 고전문학의 유일한 표본으로 르네상스 (Renaissance) 시대까지 전해졌습니다. 그 덕분에 이 시기 학자들은 여기저기 산재해 있는 전승 자료들을 모아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의 걸작들을 복원할 수 있었습니다.
6. 하기아소피아 성당 - 서기 537년
유스티니아누스(Justinianus) 황제의 권세가 재로 변할 위기에 처했습니다. 비잔틴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의 황궁이 반란군의 봉기에 황폐화되고, 3만여 명이 죽었으며, 도시의 절반이 불에 탔습니다. 식량이 모자란 데다 자연재해까지 겹쳤는데도 높은 세금을 거둔 데 대한 시민들의 불만이 팽배해지면서 제국의 위세가 풍전등화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유스티니아누스는 과감하게 불사조의 부활전략을 구사했습니다. 위협받는 콘스탄티노플을 제국의 신성한 수도로 만들어 정통성을 얻어내고 싶었던 그는 "아담 이후로도, 미래에도 전혀 볼 수 없을 것 같은" 대성당의 축성을 지시했습니다. 그 대성당의 이름인 하기아소피아 (Haga Sophia)는 '성스러운 예지(Holy Wisdom)'라는 뜻입니다. 그 이름에 걸맞게 소피아 성당이 빠른 시일 내에 완공된 것에 관련된 갖가지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두 건축가가 이 로마 시대의 걸작을 한 달 만에 설계했다고 합니다. 건축기간 동안 성직자들은 찬송가를 불렀으며, 그 사이 건축업자들은 제국 곳곳의 잔해더미에서 기둥과 대리석 조각들을 모아 왔습니다. 축성식에서 유스티니아누스는 그 성당을 신에게 바치겠노라고 선언했고, 자신의 공적도 덧붙였습니다. "이 걸작을 완성하도록 제게 소임을 주신 하느님께 영광을!"
성당 내부의 신자들에게 햇살을 비추게 하는 지름 33m의 소피아 성당 원개형 돔은 이후 1천 년 동안 어느 건축물도 필적할 수 없는 위상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이 바실리카 양식의 성당은 그리스정교회의 중심이자, 황제들의 즉위식이 열리는 콘스탄티노플의 중심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 건축양식은 기독교 문화권에 영향을 미쳐 이를 뒤따르는 건축물들을 등장시켰으나, 그 장엄함은 결코 모방하지 못했습니다. 이후 1453년 이슬람교의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지배하게 되자 새 통치자들은 그 성당에 4개의 뾰족탑을 세우게 한 뒤 아야소피아(Aya-sofia)라는 이슬람교 사원으로 개명했습니다. 예수를 묘사한 모자이크에 회칠을 하고, 성스러운 벽에서 메카를 향해 기도하는 의식이 수세기 동안 이어졌습니다. 성당의 기원은 기독교였지만, 그 건축적 영향은 이후 모든 이슬람 문화권에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7. 무함마드의 탄생 - 서기 570년
수세기 동안 아라비아의 순례자들은 후발(Hubal) 신을 모시는 카바(Kaaba) 신전이 있는 사막의 도시 메카(Mecca)에 몰려들었습니다. 그곳에서 570년 한 사내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신전과 신비한 '검은 바위'를 지키는 유목민 부족의 아들이었던 이 아이는 그 신전의 주인을 영원히 바꿔놓았습니다. 부모를 일찍 여의어 고아가 된 무함마드(Muhammad)는 메카의 친척들 사이에서 성장하며 카바의 의식에도 참여했습니다. 그는 청년이 되자 대상을 이끄는 부유한 여인과 결혼했지만, 평범한 일상에 안주하지 못했습니다. 무함마드는 앞날을 알려주는 신의 계시를 받은 뒤 행로를 놓고 괴로워하게 됩니다. 그 시절 아라비아반도 지역에서는 기독교와 유대교가 번성하고 있었는데, 그들 모두는 유일신 알라(Alla)의 추종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다신교를 믿는 아라비아 부족들과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무함마드는 명확하게 인생과 종교의 의미를 깨닫고 알라의 계시를 전하는 신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알라 외에는 신이 없다. 무함마드는 그의 예언자다."
능숙한 정치가였던 무함마드는 수천 명의 추종자들을 조직했습니다. 그는 630년 메카를 정복한 뒤 카바의 이교도 우상들을 파괴하고, 그곳을 이슬람교의 성소로 만들었습니다. 아직도 수백만 명의 이슬람교 신자들은 신앙 중심지인 메카를 찾아가 신전에 기도를 올리고 있습니다.
8. 목판 인쇄 등장 - 서기 593년
6세기경 중국에서 불교도였던 수공업자가 불경을 값 싸고 빠르게 재판하는 기술을 개발했습니다. 목판 인쇄 법이 등장한 것입니다. 그 기술을 육성한 인물은 수나라 황제 문제(文帝)였습니다. 그는 서기 593년 불교회화와 불경을 편찬하라고 선포합니다.
인쇄방법은 간단하면서도 매우 혁명적이었습니다. 부드러운 목판 위에 경전의 문구와 불화가 그려진 얇은 종이를 붙입니다. 이후 그 모양을 따라 목판에 새기는 작업이 진행되고, 마침내 하나의 도장 같은 목판이 완성되었습니다. 이어 그 목판 위에 잉크를 바르고 새 종이를 대어 찍어냅니다. 하루에 2천 페이지 정도를 재판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인쇄술은 화약, 종이, 나침반과 함께 중국의 4대 발명품 중 하나로 일컬어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