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역사 포스팅을 써보네요. 이번에는 중세 시대 중 서기 1100년대에 일어난 몇 가지 사건들에 대해 가볍게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모든 역사를 다루기엔 너무나 방대하기 때문에 제가 생각하기에 시대별로 재미있을만한 사건들을 몇 가지 추려서 정리하고 있는 포스팅입니다. 그렇기에 자세한 역사를 알기보다는, 그 시대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주요 키워드를 알아본다고 생각하면 좋을 듯합니다.
제가 역사 포스팅을 쓸 때 혹시나 저작권 이슈가 될까 싶어서 이미지를 넣지 않고 있는데, 생각해보니 사진만큼 한눈에 이해가 되는 것도 없는 것 같아서 나중에 전체적으로 업데이트를 좀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딕 성당 (서기 1120년)
서유럽 건축사에서 가장 유명한 고딕 양식은 프랑스에서 발달된 석조 건축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건축 기술인 '리브 볼트(rib vault)'와 '플라잉 버트레스(flying buttress)' 기술이 결합되어 성당의 첨탑을 더욱 높이 올릴 수 있게 된 것이죠. 첨탑이 높아짐에 따라 성당의 내부 공간은 더욱 넓고 개방되어 예배자들이 신성한 빛과 함께 겸허한 마음으로 기도를 올릴 수 있었습니다. 스테인드 글라스로 된 창과 조각상들은 고딕 건축의 대표적인 장식 요소인데요, 이 시절 건축가와 석공들은 노트르담 성당, 샤르트르 성당, 웨스트민스터 사원 등 걸작 건축물을 만들어냈습니다.
앙코르와트 (서기 1150년)
앙코르와트는 캄보디아 국기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 지역의 대표적인 사원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종교 유적인 앙코르와트는 전체 건축물을 에워싸고 있는 해자 180미터를 포함하여 전체 둘레가 약 800미터에 달합니다.
크메르족이 세운 앙코르 왕국의 수리아바르만 2세는 1050년 자신의 무덤이자 힌두교의 모체인 브라만교의 주신 '비슈누'를 위한 사원을 건설하기 시작했습니다. 단순한 사원 건설이 아닌 전통 신앙에 따라 신과 신성한 지도자가 합일한다는 의미가 담겨있었습니다. 돌을 정교하게 조각하여 완성한 탑과 해자는 각각 브라만교의 우주관을 나타냅니다. 이 사원은 거주지로서의 역할도 했는데요, 전성기에는 무려 6만여 명의 학자들이 이 사원에서 생활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14세기에 앙코르 왕국이 몰락한 이후, 이 사원은 그대로 방치가 되었습니다. 서기 1177년 참(Cham)족에게 앙코르를 약탈당한 이후, 자야바르만 7세가 새로운 수도와 사원을 건설했기 때문이죠. 하지만 성좌불교 승려들이 정글에 뒤덮였던 이 사원의 건축물들을 보호했으며, 이곳은 수세기 동안 불교도에게 중요한 성지 순례지가 되었죠. 즉, 처음 건축할 당시 앙코르와트 사원은 브라만교 사원이었지만 14세기 들어서 불교에 헌정되었습니다.
앙코르와트는 건축 관점에서 회반죽 없이 건축되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저 돌의 무게와 마찰력으로 전체 사원의 구조를 지탱하고 있는 것이죠. 현재 이 중요한 유적지는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보존되고 있습니다.
둥근 지구, 세계지도 (서기 1154년)
시칠리아 왕국을 세운 로저 2세는 과학적으로 정확한 세계지도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당시 만들어졌던 지도들은 선원들의 항해도이거나 정치적인 이유로 자신들의 후원자를 중심에 그려 넣은 삽화들뿐이었기 때문이죠. 왕실의 후원을 받은 아랍인 지도제작자인 아쉬샤리프 알 이드리시는 그리스와 아랍의 고대 지도를 통해 지리 정보를 모으면서 새로운 땅을 조사하기 위해 탐험가를 내보냈습니다. 이렇게 수집한 자료들을 취합해보니 이는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알 이드리시는 7개의 대륙과 바다로 된 자신이 만든 지도를 무게가 900파운드에 달하는 은빛 구체 위에 기록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둥근 지구를 보여주는 세계 지도의 탄생이었습니다.
마이모니데스 (서기 1159년)
마이모니데스는 유대교 사상가로, 유대교 율법인 '탈무드'의 최고 권위자였습니다. 그의 삶은 당시 유대인들이 새천년의 전환기에 경험했던 다양한 특권과 박해를 드러내고 있기에 유대인의 상징적인 인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마이모니데스의 삶을 하나하나 살펴보기엔 너무나도 방대한데요, 주요 포인트만 짚어보고 가겠습니다.
마이모니데스는 1135년경 코르도바의 지식인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아랍인들의 지성주의와 종교적 관용기를 맞아 이슬람 세계에서도 높은 지위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복 정책을 표방한 칼리프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종교 관용의 시대가 저물기 시작했습니다.
알 모하즈가 스페인에서 권력을 잡은 뒤로 유대교를 신봉하는 것은 사형에 이르는 범죄 행위가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어린 마이모니데스와 그의 가족들은 다른 유대인들처럼 코르도바에서 계속 생활하면서 몰래 자신들의 신앙을 지켜나갔습니다. 마이모니데스가 10대가 되었을 무렵, 가족들과 함께 스페인을 떠나 모로코부터 마지막에는 이집트로 이주해가며 몇 년씩을 보냈습니다.
성인이 되었을 무렵에는 철학과 탈무드 율법에 관한 걸작들을 집필하기 시작했습니다. 13개의 원칙에 따른 유대교 율법과 이론을 총 정리한 '미쉬나 토리'를 만들었습니다. 철학 저서인 '방황하는 자들을 위한 안내서(The Guide for the Perplexed)'는 전 세계 사상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기도 했습니다.
그는 의사로도 활동을 했었는데, 슐탄 살라딘을 치료한 것이 가장 유명한 일화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슬람교가 지배하는 스페인 지역에서 지내던 유대인인 '세파르딤'과 기독교가 지배하는 유럽 지역의 유대인인 '아시케나지'는 모두 12세기와 13세이게 반유대주의로 고통받았습니다. 이들은 경제활동을 금지하는 법률들에 따라 가난과 게토(ghetto)로 내몰렸죠. 또한 십자군들은 유대인 마을에서 잔인한 학살극을 벌였고, 일부 지역의 유대인들은 팔에 노란색 표식을 붙여야만 했습니다. 이 끔찍한 표식은 추후 나치 독일에서 다시 등장하기도 합니다.
많은 유대인들은 영국(1290년)과 프랑스(1306년)에서 추방에 직면하자 기독교로 개종하기도 했습니다. 마이모니데스의 가족들 또한 다른 유대인들처럼 개종한 척하면서 몰래 유대교 신앙을 이어갔습니다. 이러한 유대인에 대한 적대적인 환경은 스페인의 종교재판과 약 1천 년 뒤에 나타난 히틀러의 잔혹한 유대인 학대의 역사적 배경이 되었습니다.
술탄 살라딘 (서기 1171년~1187년)
십자군 전쟁이 발발한 지 80년이 지나면서 예루살렘은 오랫동안 기독교인들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십자군 국가들이 갑자기 등장하여 중동 지역 전체 이슬람의 지배권을 위협한 것이지요.
이러한 위기 상황에 절망하고 있던 이슬람교의 왕은 젊은 쿠르드족의 군 사령관에게 도움을 청했는데, 그가 바로 '살라 알 딘 이븐 아이유브', 즉 우리에게 '살라딘'으로 알려진 인물입니다. 살라딘은 애초에 왕이 제시했던 보상보다 더 많은 것을 차지했습니다. 왕의 통치권까지 빼앗은 것이었죠. 그리하여 살라딘은 스스로를 카이로의 술탄으로 칭했습니다.
이 사건은 오랜 전쟁으로 고통받고 있던 중동 지역민들에게는 좋은 소식이었습니다. 살라딘은 술탄 자리에 앉자마자 현명하고 너그러운 통치자로 존경받았습니다. 권좌에 오른 첫 15년 동안 이웃한 분파들을 통합하는데 힘썼고 시리아, 팔레스타인, 예멘의 술탄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한 우산 아래 무슬림 국가들은 살라딘이 목표했던 대로 십자군에 맞설 군사력을 갖추게 되었죠.
이후 제2차 십자군 전쟁에서 잘 훈련된 살라딘의 군대는 하틴 평야에서 대규모 십자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뒀습니다. 대패한 십자군은 다시 전세를 회복하지 못했죠. 그리하여 살라딘은 이후 3개월 동안 십자군의 지배를 받고 있던 예루살렘을 포함한 나머지 성지를 해방시킬 수 있었습니다.
피사의 사탑 (서기 1173년)
여행객들의 사랑을 받는 여행 명소인 피사의 사탑은 처음부터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피사'는 12세기 후반에 번창한 독립 항구도시로, 1063년 이슬람교도의 지배에서 벗어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대성당 건립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당시 기술자들은 피사의 부드러운 모래로 이루어진 땅이 대리석의 무게를 견지디 못하고 내려앉을 수 있다는 것을 미처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대성당 건설은 초반에는 잘 진행이 되다가 마지막 작업인 종탑이 세워지면서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건축 책임자였던 보나노 피사노는 탑이 기울어지는 것을 막아보려고 몇 차례 시도했으나 세 번째 회랑을 지은 후에는 결국 낙담하고 말았습니다. 이후 종을 포함한 탑의 모든 시설물들이 완공되기까지는 200년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현대에 들어와 건축 전문가들은 사탑의 붕괴가 임박했다는 것을 알고, 급기야 2001년에는 탑의 기울기를 보정하기 위해 대공사를 하기도 했습니다. 공사 이전에는 사탑이 수직선에서 15피트 정도 기울어졌으나 공사 후에는 13.5피트 정도로 조정되었습니다. 이 덕분에 피사의 사탑은 앞으로도 200~300년간은 안정적으로 서있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기까지 서기 1100년대에 일어났던 몇 가지 역사적인 사건들을 알아보았습니다. 조만간 고대 시대 역사 포스팅도 업데이트할 예정이니 기다려주시기 바랍니다 :)